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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적 풍경과 자전적 내면

2007년 5월 오광수 | 미술평론가

1         정강자의 화력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으로부터 시작된다. <청년작가연립전>은 주지하다시피 포화상태에 빠진 뜨거운 추상미술(추상표현주의)을 벗어나려는 에폭 메이킹의 기폭제가 된 전시다. 세 개의 그룹이 연합된 이 전시에 정강자는 <신전>동인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작품은 당시로선 대담하면서도 파격적인 인스톨레이션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평면에서의 탈출은 작가의 내면에로의 여행으로 명명되었던 추상표현주의의 미망에서 자신을 해방하는 행위이자 미술이 갖는 장르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그는 퍼포먼스를 통한 왕성한 활동을 펼쳐 보였다. 우리나라 퍼포먼스의 제1세대의 대표적인 주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혼과 더불어 해외에서의 장기체류로 인해 국내에선 점차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가 국내에서 발표를 재개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한동안의 부재를 만회하기라도 하듯 잇따른 전시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세계는 체험으로부터 획득된 풍경과 내면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남아시아를 위시해서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멕시코, 남미, 아프리카 등 수많은 지역을 돌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조형화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화면은 이국적인 풍물과 정서가 지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가 구현하는 이 같은 세계는 적어도 국내 미술에선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하고 있다. 국내에서 미술대학을 나온 이들로선 일정한 계통을 갖고 있음이 보편적이다. 아카데믹한 경향이면 아카데믹한 경향대로, 추상적 경향이면 추상적 경향대로 계보가 있고 이러한 계보에서 쉽사리 이탈할 수 없는 것이 미술계의 풍토이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한다면, 정강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존재로서 돋보인다. 어떤 울타리가 갖는 분위기나 계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애초에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해나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계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에도 끼이지 못하는 소외자로 취급 받기 십상이다. 그만큼 그의 길은 스스로 지난한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이 독특하다는 것은 먼저 그가 선택하고 있는 모티프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이미지의 원천은 오랜 해외여행을 통해 얻은 영감원에 닿아 있다. 이국풍경이 갖는 의외로움과 경이로움은 예술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자연, 새로운 사물,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의 조형의 영감의 샘이 되어 흘러넘치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이 갖는 특이한 요소는 환상과 초현실의 세계로 뒤덮혀 있음이다. 환상과 초현실이란 일상에서 벗어난 꿈의 세계 환시의 세계를 말한다. 예술은 그것이 아무리 현실과 닮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표현은 꿈의 세계이며 환시의 결과일 뿐이다. 예컨대 여기 화가가 그린 먹음직한 과일이 있다고 하자. 누가 보아도 살아있는 듯한 영롱하게 윤이 나는 과일일지라도 그것은 현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착각의 세계일 뿐이다. 그런 만큼 꿈과 환시는 회화의 세계에선 풍부한 표현의 인자가 된다. 정강자의 화면이 꿈과 환시로 넘쳐난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한 예술세계의 자양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환상이나 초현실의 세계는 의식의 바다에 있는 세계이자 현실 너머의 세계이기 때문에 때때로 어두운 내면, 기이한 풍경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정강자의 화면에서 만나는 꿈의 세계나 환시는 밝고 건강하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은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밝고 건강하다는 또 다른 징표일 수 있다.

 

2         그의 작품은 한동안 멕시코 벽화나 아프리카 원시예술에서 깊은 감화를 받은 흔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초 프랑스의 소박파(프리미티브) 화가들의 치졸하면서도 풋풋한 정감으로 넘쳐나는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소박파 화가 두아니에 루소의 밀림 속에 누워 있는 누드를 닮은 <꿈>은 정강자 특유의 방법으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화면이 갖는 폭발하는 에너지는 거대한 드라마를 일구어가면서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신의 조형화로 줄달음친다.

회화의 세계는 종내 색채와 형태다. 대상은 단순한 매개일 뿐이다. 색채와 형태가 모티프를 앞질러 강렬하게 표상된다는 것은 그만큼 회화의 본질에로 다가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정강자의 화면에 나타나는 대상은 다양하지만 종국에는 강렬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원색의 대비는 강렬한 만큼 폭발하는 내면을 지닌다. 형태는 더욱 입체성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직설적인 구현은 솔직함과 대담함을 지니면서 치졸함을 담당함으로 치환해놓는 놀라운 변모를 보인다. 그가 만나는 이국의 풍경이나 풍물이 강렬하면 할수록 화면은 짙은 환상으로 뒤덮혀 간다. 단순히 어떤 대상을 표현했다기보다 대상의 내면, 그려지는 사물이 지닌 내면이 생동하는 생명감으로 구현되어진다.

2004년경부터 그의 화면은 자전적인 요소로 채워지는 변화를 보인다. 밖으로 향했던 시선이 자신과 자신의 내면 풍경 쪽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자전적인 요소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이다. 밖을 향했던 시선이 안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성숙의 또 다른 현상을 시사함이 분명하다.

안으로 옮겨진 시선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작업이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일련의 작품 가운데는 숲 속에 나타나는 여인 와상이 다수를 이룬다. 벗은 여인의 누워있는 광경은 숲과의 어울림으로 더욱 원생적인 생명감을 표상한다. 자신과 자연과의 관계를 건강한 화해로 구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누워 있는 여인은 숲 속에서 잠든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공중으로 떠가는 모습으로 등장되기도 한다. 비너스의 탄생처럼 부끄러운 모습으로 숲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비너스가 물에서 태어난 것과는 달리 그의 화면에선 숲에서 배어난다. 생명의 원천을 물에서 찾은 그리스 신화와는 달리 그의 신화 속엔 여인이 숲에서 태어나는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생의 권리를 공유하는 범신론적인 사상을 함유하면서.

 

3         “우주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 원자, 그 원자의 형태는 원이다. 직선도 엄밀히 말해 원의 형태인 점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니 원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2005년 전시 도록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그가 새삼스럽게 발견한 모든 형태의 원형상이 다름 아닌 원이란 것이다. 환원의 형식이 원으로 표상된다는 것은 생명의 원천이 역동적이란 사실을 함유하고 있다. 원은 정지되어 있는 형태가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임으로 해서 생명감을 대신한다. 이 점은 그의 작품이 내장한 에너지의 폭발하는 현상과도 조응된다. 부단한 순환을 통해 생명은 잉태된다. 원은 우주의 시작이고 동시에 끝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인간이나 자연의 형태가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표현되어진 것을 엿볼 수 있다.

근작으로 오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대상이 원 또는 반원들이 모여지면서 구체적인 대상으로 현현된다. 파편화된 원과 반원이 서로 얽혀 들면서 암시적인 형태로 부상한다. 춤추는 한복의 여인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머니와 딸의 모습으로 구현되어지기도 한다. 창공을 날아가는 새처럼 원과 반원의 나래로 펄럭이며 떠가는 모녀 상이 되기도 한다. 원은 두 개의 면으로 쪼개지면서 야누스의 모습으로 표상되고도 한다. 모든 사물은 원과 반원의 형태로 환원되어진다. 그것들은 바람에 날리는 꽃잎같이 화사한 풍경을 연출해 보인다, 마치 환희의 축제처럼.

공간에 무수한 원과 반원의 파편들이 서로 얽히기도 하고 서로 밀쳐내기도 하면서 거대한 무브망을 이루어놓는다. 세부적인 형태가 원과 반원으로 환원되지만 전체의 모습에선 역동적인 질서들 구현하는 또 다른 실체로서 나타난다.

근작에 빈번히 나타나는 모티프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다. 여인들은 우아한 춤사위를 보여 주는가 하면 장고를 추는 역동직인 동작으로 화면 전체를 어떤 소용돌이의 구성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한국의 전형적인 여인상을 모티프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하나의 응답의 형식으로서 말이다. 오랜 여정을 통해 자신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지점이 다름아닌 자신의 고향 한국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이국의 신기한 풍경과 풍속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던 그의 화면은 서서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으로 침윤되었으며 건강한 범신론적 조화와 친연을 표상하였다. 종내는 이 모든 대항이 갖는 지시적인 내용은 사라지고 오로지 색체와 형태라는 회화 고유의 존재론에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근원 인자가 원이란 사실의 발견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회화의 도정은 외부로 향한 강한 관심으로 촉발되었다가 점차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밟았으며 그러한 도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이 다름 아닌 원이란 환원의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환원으로서 원의 형식 속에 수렴되어진다. 단순한 형태 속에 강렬한 색채의 어우러짐은 신비로운 질서를 만들어간다. 그 속에서 명멸하는 것이 한국의 여인상이다. 그러니까 원은 한국의 여인상과 어우러지면서 거대한 무브망과 생명의 환희를 표상시킨다. 생명은 경이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 역시 경이란 사실을 그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Artist & ARARIO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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