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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 한복의 선으로 그려진 몽상의 풍경

1999년 5월 박영택 | 미술평론가, 경기대교수

1         인간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자기 밖의 어떤 힘일 것이다. 그것은 종교 혹은 사상이나 신념, 이데올로기 등이다. 아마 예술 역시 그러한 힘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이들에게는, 그림이 삶에 모종의 믿음을 주거나 힘을 준다고 믿는다. 인생의 성취감 같은 것도 말이다. 그것은 그림 그리는 행위 그 자체에서 혹은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의 물신주의를 통해 나온다. 화가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 그림을 지속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삶을 부단히 확인해 나가는 일이란 어찌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일종의 신화에 깊숙이 잠겨 있는 편이다. 예술가란 존재가 일상적인 삶에서 기능하는 물건들을 생산하는 단순한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예술이란 것을 자신(개인)의 영혼을 구제할 삶의 목적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재적 개인이 참조하는 예술, 그것이 현대미술이 되었다.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삼과 꿈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보상으로서의, 치유로서의 예술에 근접해 있다. 예술/미술은 비로소 삶의 후면으로 들어가 그 내적 상처를 보듬거나 충족되지 못하는 사회적 삶의 억압을, 이룰 수 없는 생의 과제와 세계에 대한 미망의 꿈, 유혹 등을 구현해 주는 것이 되었다. 삶을 구원하는 것이 이제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 된 것이다. 따라서 충족될 수 없는 삶의 비전을 화폭 안으로 투영하는 것, 그것이 그림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결국 쓸쓸한 그림자인 것이다. 그 그림자 속에는 현실이 되지 못하는 삶의 매혹에 대해 고뇌하는 예술가라는 개인적 신화관이 은닉해 있다. 모든 그림에는 그래서 충족되지 못한 욕망, 보상받을 수 없는 삶의 상처, 이룰 수 없는 꿈, 외로움들이 번져 있다. 무수하게 구멍 나 있다. 화려한 그림일수록. 집요한 그리기로 나앉은 그림일수록 말이다.

2         정강자의 지난 그림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고 화려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림보다는 작가가 더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그림 그리는 작가로서의 '인생'이 '그림'보다 더 불거져 나온다. 『일에 미치면 세상이 아름답다』는 작가의 책도 읽어보았다. 세계의 오지 곳곳을 여행하고 돌아와 이를 생경할 정도의 원색과 프리미티비즘적으로 소화한 일련의 그림들이 여행기와 함께 실린 것도 보았다. 얼핏 천경자의 그림과 글 그리고 프리다 칼로가 연상된다, 그 화려함을 동반한 섬뜩함도 결국 삶의 상처와 소실된 꿈에 대한 보상으로의 성격이 짙은 그림들이었다. 캔버스에 유화, 아크릴릭으로 구사하는 작업을 풍해 작가가 매일, 오랜 시간 그려 놓은 그림들은 사실 그림을 그리며 사는 자신의 삶의 증거, 기록이 되어 보는 이에게 다가온다. 작가란 무엇보다도 매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그 그림이 유일한 일이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소진시키는 이들이며, 따라서 그 행위의 정당성, 보상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은 이들이다. 그림을 많이 그린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는 위안을 준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작가라는 존재로서의 자기 충실감을 의식적으로 채워내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기 삶의 보상과 확인에 가깝다. 정강자의 작업도 자신의 체험과 삶으로부터의 소외감에서 나온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대단히 깊다. 남성중심의 한국 사회와 화단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여성으로서 혹은 여성 작가로서의 소외와 가난 속에서 자신의 성취감과 자기 의지의 굴곡진 여정이 고스란히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한국 최초의 해프닝 작업 내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미의식의 표출, 이후 회화로 복귀하면서 끌어들인 원시와 낭만, 몽상과 환상이라는 성격을 부단히 채워 넣는 작업들 속에는 그의 우리 화단과 사회에 대한 일정한 저항과 동시에 생존의 모색. 실존의 초상들이 아프게 엉켜있다. 그것은 거의 애증에 가까운 그림 그리기이다.

 

3         정강자의 최근작은 이전 작업에 비해 무척 순화되고 단출해졌다. 여전히 거칠어 보이고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그림이다. 최근의 한복 시리즈는 이미지의 물신주의적 성격을 지운 자리에, 두드러지게 다가오는 공간감, 그리고 그 위에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치마, 인물, 그리고 풍경들이 얹혀져 있다. 황토색과 짙은 파랑색조가 주축으로 깔리고 그 모노톤의 바탕 색조를 흡사 가르고 나오는 듯한 효과, 일종의 부조 효과를 보여주면서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이 틈, 상처가 되어 갑자기 공간에 활력을 주면서 미묘한 이미지가 출현한다. 선택된 색조는 색채가 지니는 신비한 내면적 가치에 주목한 색 또는 작가가 깨달은 가장 한국적인 색(황토색), 그리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색이다. 그것은 건조하고 황량하면서도 광막한 느낌을 준다. 색채가 지니는 면적인 가치, 색면이 강조되는 화면은 결국 독특한 색채 공간, 화면을 만들고 있다.

 

화면을 가르고 나오는 듯한 처리는 갈라터진 홈, 찢겨진 상처처럼 보이면서 평면을 눈속임과 환영을 통해 탈평면화시켜 흡사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재미난 작업이다. 아울러 사물들의 병치가 교묘하게 얽혀있다. 치마가 산 이 되고 치마 주름이 눈썹이 되는 가 하면 한복이 풍경이 된다.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구사하던 방법론이다. 창조의 자동적 파악은 또한 호앙 미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암시적인 기호와 색채의 감각적 구상이 펼쳐 보이는 추상적 세계란 풍부한 공상과 유머러스한 상징적 공간이 맞물린 세계이다. 정강자의 이런 작업은 아마도 여러 낯선 이국, 그 오지를 돌아다닌 체험에서 연유하는 환각 인 것 같다. 동시에 강렬한 꿈의 가시화이자 자신의 삶, 여성으로의 삶에 대한 의미들의 노해 같다.

 

대상성을 탈피하지 않으면서도 그 형태를 유기적인 구조에 의해 분해해가는 작업도 눈에 띈다. 상상력과 환상을, 대상을 개념화시키는 선만으로 그 선의 겹친 자국과 덧칠로 표현하고 있다. 정강자의 선은 그 자체로 강한 추상성을 환기시킨다. 공간에 주름을 잡고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선들은 암시적이고 함축적이다. 그 선은 한복, 버선 등의 한국 여성의 의복(한국미와 한국인의 의식이 깃든)을 통해 여성에 대해 또는 한국적인 미의 특질을 들려주려 한다. 작가에 의하면 한복은 “수천 년을 남성우월주의의 지배에서 억압받고 유린당해온 우리 여인들의 깃발이요, 자유를 향해 맘껏 나는 한풀이, 억압받고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만 받고 살아도 말없이 견디고 버텨온 우리 여인네의 한을, 치마를 묶은 끈이, 날고 잘려나간 끈이 새가 되고 구름이 되어 떠돈다. 나는 늘 꿈을 꾼다. 몽상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한다. 내 작품에 우리 여인네의 삶과 한이 고스란히 옮겨지곤 하는 것이다.”(작가노트) 페미니즘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러나 그림 안에서 그 페미니즘의 성격을 명확히 적출하기란 애매하다. 그보다는 그림을 통한 여성으로서의 자기 삶의 반추나 몽상의 흔적이 더 강하다. 작가는 치마, 한복을 발견하고 이를 응용해 다양한 풍경을 그린다. 그 풍경은 내면의 풍경이다. 한복은 바람의 옷이고 한국인의 마음과 의식, 미감까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받아들이며 몸을 감추는 한복, 부드럽고 여유 있는 선, 강렬한 원색, 날개의 선을 담은 의복선은 날고자 하는 비상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결국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적 세계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더욱이 여성의 한복은 한국 여인의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의복이다. 그 한복의 선과 주름을 교묘하게 이미지와 결합시켜 환상적인, 기묘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정강자의 최근작은 비로소 자기식의 회화가 정초되어가고 있음을 은연중 암시해준다.

©Artist & ARARIO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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