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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하고 진정한 은비(隱祕) : 화가 정강자의 후기 회화
박혜성(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나를 그저 정강자라 불러다오.”
우리는 정강자(鄭江子, 1942-2017)를 상반신에 투명 풍선을 붙인 채 반나체로 서 있는 흑백사진 한 장 속 여성으로 기억한다. 1968년 5월 명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벌인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제목의 이 해프닝을 계기로, 당시 사회는 정강자를 선정적인 통속잡지 『선데이 서울』을 채운 관능적인 ‘벗은 여성’으로 취급했지만, 동시대는 그녀를 한국 1세대 여성 전위예술가, 행위예술가로 칭한다. 사실 그녀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근래의 일이다. 추상과 민중미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거대서사에 실험미술의 자리가 새롭게 구축되며 홍일점이었던 그녀의 존재가 서서히 부각되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에 출품된, 커다랗고 기이한 진분홍 입술(<키스미> (1967) 제재작)과 더불어 그녀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무척 고무적이고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투명풍선과 누드>를 포함한 몇 장의 흑백사진과 제재작된 1960년대 후반 오브제로만 그녀를 소환하고 있지 않은지? 정강자는 1970년 국립공보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 《무체전(無体展)》이 강제 철거된 일을 계기로 작품활동을 중단했고, 결혼 후 1977년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이주해 한동안 한국 미술계를 떠나 있었다. 1982년 귀국해 2017년 위암으로 별세할 때까지 그녀는 잠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음에도 이후 작업에 대해서는 덜 알려져 있다. “나는 요즘 살맛이 난다. 30년간이나 고민해 오던 내 작품세계가 이제야 공고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던 정강자의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인을 “그저 정강자로 불러달라”는 작가의 간절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서는 실험미술 이후의 작업과 그녀의 삶을 들여보아야 한다. 귀국 후에도 싱가포르 체류 시절 익힌 ‘바틱’이라는 염색기법을 시도했지만 그녀가 하루 열두 시간 이상 매진하면서 천착한 매체는 회화였다. 전위적인 퍼포먼스에서 회화로 매체는 바뀌었지만,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작가의 작업 목적과 태도는 변함없었다.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신비의 심연에까지 심화시켜야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삶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강자의 회화는 현실 재현을 뛰어넘는다. 오광수는 정강자의 회화를 두고 “국내 미술에서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대단히 예외적인 존재”라 평가했는데 이는 이른바 “환상과 초현실”(오광수), “환상과 꿈, 다시 말해서 몽상의 세계”(김복영), “원시와 낭만, 몽상과 환상”(박영택) 등의 특징 때문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미 싱가포르 체류 시절과 귀국 직후 1980년대 초중반에도 나타나지만, 1987년 중남미 여행으로 시작한 세계 오지(奧地) 여행 이후 본격화되었다. 귀국 후 이혼한 작가는 생계와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녹녹지 않은 상황에서도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30여 개국을 여행했다. 여행은 “어머니로서, 여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 “시간을 분 단위로 나눠 쓰던” 그녀가 작업과 미술학원 운영, 가사와 육아 등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처였고, 작품의 모티프를 얻을 수 있는 창작의 근원이었으며, 신문에 기행문을 연재하고 작품을 팔아 생활을 가능케하는 수단이었다.
그녀가 찾은 곳은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작가는 “원시 그대로”의 세계에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막힌 자연”과 “순박하고 탐욕이 없는 원주민”을 만날 수 있었고, “특정의 시대 및 삶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상”을 내포한 주술적인 ‘원시예술’ 특히 목조각에 매료되었다. 원시의 자연과 사람, 그리고 예술은 정강자의 캔버스 위에서 단순한 형태와 원색의 강렬한 색채, 이질적인 이미지의 병치, 그리고 현실과 환상을 섞어놓은 서사로 되살아났다.
작가 스스로 ‘초현실주의’를 의식한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그녀의 작업과 태도는 100여 년 전 유럽에서 태동한 초현실주의를 연상시킨다. 주지하듯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기독교적,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적, 백인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지되는 유럽의 가치가 인간의 삶을 편협하고 위선적이고 공포스럽게 만든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명확한 목표와 달리 대안과 가능성은 다양한 해석과 실천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른 모더니즘 미술처럼 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대신 합리적 이성주의가 부정했던 꿈, 무의식, 놀이, 이문화, 전통, 미신, 마법, 신화 등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삶과 죽음, 현실계와 상상계, 과거와 미래, 소통 가능한 것과 소통 불가능한 것 등이 일종의 절대적인 현실, 즉 ‘초현실’로 해소되기를 갈망했다. 그들에게 원시미술은 단지 조형적 흥미로움의 대상이 아니라 초현실로 이를 수 있도록 만드는 시적(詩的) 환기력을 지닌 오브제였다. 정강자 역시 원시미술을 통해 브르통이 <초현실주의와 회화>(1928)에서 말한 “순수하게 내적인 모델”에 다가가고자 했다.
“(한복은) 수천 년을 남성우월주의의 지배에서 억압받고 유린당해 온 우리 여인들의 깃발이요 자유를 향해 맘껏 나는 한풀이라 해도 좋다. 억압받고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만 받고 살아도 말없이 견디고 버티어온 우리 여인의 한을 치마를 묶은 끈이 대지를 날고 잘려나간 끈이 새가 되고 구름이 되어 떠돈다.”
초현실주의에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 것은 여성이었다.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사랑의 본능적인 잠재력과 창조력을 갖춘 여성은 ‘뮤즈’로 칭송되었고 양성체(androgyne), 아이 같은 여성(femme-enfant), 악녀(femme fatale) 등 에로틱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타자(여성)의 몸을 매개로 초현실의 세계에 도달하려했던 남성들과 달리, 여성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들의 ‘뮤즈’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의 몸과 현실을 화폭에 담기를 선호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 1908-1963), 레오노르 피니(Leonor Fini, 1907-1996), 도로시아 태닝(Dorothea Tanning, 1910-2012),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1917-2011) 등은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자아 속에서 타자를, 동일성 속에서 차이를 발견했다. 정강자 역시 싱가포르 시절부터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자화상을 적지 않게 남겼다. 그리고 여행에서 그린 구리빛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의 원주민 여성들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아낸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계를 여행한 정강자는 결국 만다라, 탱화, 단청, 무속, 민화 등 한국의 전통에 눈을 돌리게 되었는데, 이는 민족주의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전통에서 시적 환기력을 발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작가는 한복을 주요 소재로 삼았는데, 1990년대 말 이후 정강자의 캔버스에는 유려한 선과 다채로운 원색의 한복 치마가 때로는 거대한 토템으로, 때로는 깊은 협곡, 때로는 비상하는 새로 변신한다. 한복은 작가가 작업 초기부터 보인 여성의 자유와 해방의 의미를 더해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녀의 화면에는 “우주 만물의 최소 단위인 원과 인위적인 직선이 결합한” 반원이 만들어내는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형태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한의 자유공간”이 등장한다. 이는 특정 양식과 테크닉, 협의의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았던 초현실주의자들이 1929년 선언한 제2선언에서 강조했던 “심원하고 진정한 은비(隱祕)”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2023년 11월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나를 부른 것은 원시였다》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정강자의 ‘말년의 양식’, 즉 하나의 양식을 완결하고, 스스로 그걸 부수고, 또다시 새롭게 만든 양식이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가 무척 흥미롭다.
1) 김미경, 「여성미술가와 사회」, 『현대미술사연구』 12(2000); 오진경, 「한국여성주의 미술의 몸의 정치학」, 『미술사논단』(2005); 조수진, 「<제4집단> 사건의 전말: ‘한국적’ 해프닝의 도전과 좌절」, 『미술사학보』 40(2013); 정연심, 「1960년대-1970년대 한국의 퍼포먼스와 미술가의 몸」, 『미술이론과현장』 22(2016); 조수진, 「한국의 여성 행위미술가, 정강자의 ‘위험한’ 몸」, 『문화과학』 90(2017).
2) 대학시절 정강자가 창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술을 마시고 이튿날 짧은 순간 경험한 다음 일화는 작가의 초현실주의적 회화를 데자뷰하는 듯해 흥미롭다. “얼마를 지났는지 모른다. 의식이 들락말락 하는데 이상한 형상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우리반 실기실엔 마침 정물을 그리는 기간이라 다른 반은 북어나 사과, 꽃 등이 있었지만 추상반인 우리반에는 소 두개골, 낡은 시계, 쭈그러진 주전자 등 그야말로 정크아트의 오브제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것들이 내가 그리려고 세워둔 흰 캔버스 위에 낱낱이 흩어져 있거나 더블 포커스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 신비한 그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학시절의 시도가 평생을 좌우한다」, 『일에 미치면 세상이 아름답다』(파주: 형상출판사, 1998), p.57.